신체 없는 존재, 존재 없는 신체

디지털 전환기에 등장한 새로운 존재 양식으로서 ‘인포보그(Infoborg)’ 개념을 제시하고, 이것이 기존의 포스트휴먼 담론과 어떻게 차별화되는지 고찰한다. 인포보그는 물리적 신체에 의존하지 않고 순수하게 정보적 데이터를 통해 구성되는 존재로서, 기존의 사이보그, 포스트휴먼, 디지털 트윈, 트랜스휴머니즘 담론이 여전히 전제하고 있는 신체성과 동일성의 논리를 근본적으로 해체한다. 본 연구는 인포보그가 단순한 기술적 파생물이 아닌, 정보 자체가 주체성을 형성하는 새로운 존재론적 패러다임임을 논증한다.

근대 철학의 핵심을 이루는 자율적 주체 개념은 생물학적 신체와 통합된 개별적 자아를 전제로 구축되었다. 데카르트의 코기토(cogito)에서 시작된 이 전통은 칸트의 선험적 주체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서구 철학의 기본 토대로 작용해왔다. 그러나 20세기 후반 이후 기술의 급속한 발전과 함께 이러한 전통적 주체 개념은 근본적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특히 정보통신기술의 발달과 인공지능의 등장은 인간 존재의 고유성과 독립성에 대한 기존 가정들을 흔들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도나 해러웨이(Donna Haraway)의 사이보그 이론, 캐서린 헤일스(N. Katherine Hayles)의 포스트휴먼 개념, 그리고 한스 모라벡(Hans Moravec)과 레이 커즈와일(Ray Kurzweil)로 대표되는 트랜스휴머니즘 담론이 주목받아왔다. 그러나 이들 담론이 인간 주체의 경계 해체를 추구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물리적 기반이나 연속적 정체성에 대한 전제를 완전히 극복하지 못했다는 한계가 지적된다. 본 논문은 이러한 한계를 넘어서는 새로운 존재론적 개념으로서 ‘인포보그(Infoborg)’를 제시하고, 이것이 기존 담론과 어떻게 차별화되는지 체계적으로 분석하고자 한다.

기존 포스트휴먼 담론의 한계와 신체성의 잔존

해러웨이의 사이보그 개념은 1980년대 등장 이후 인간과 기계의 경계를 해체하는 급진적 사유로 평가받아왔다. 사이보그는 “기계와 유기체의 혼종물(hybrid of machine and organism)”로서 자연과 문화, 남성과 여성, 문명과 원시의 이분법적 경계를 무너뜨리는 해방적 잠재력을 지닌다(Haraway, 1985). 그러나 사이보그 개념이 아무리 급진적이라 하더라도, 여전히 생물학적 기반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한계를 드러낸다. 사이보그는 본질적으로 인간의 신체를 기계적 요소로 보완하거나 확장하는 존재이며, 따라서 물리적 실체성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다. 이는 해러웨이 자신이 “몸 없는 사이보그는 없다(There are no disembodied cyborgs)”고 명시한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헤일스의 포스트휴먼 이론은 정보와 물질의 상호작용에 주목하며, 인간을 정보 처리 시스템으로 재개념화한다. 그녀는 『우리는 어떻게 포스트휴먼이 되었는가』(1999)에서 인간 의식이 컴퓨터 프로그램처럼 정보 패턴으로 환원될 수 있다는 자유주의적 주체 개념을 비판하면서도, 동시에 정보와 물질적 기반의 불가분성을 강조한다. 헤일스에 따르면, “정보는 물질적 기반 없이는 존재할 수 없으며, 물질적 기반 역시 정보 없이는 의미를 갖지 못한다”(Hayles, 1999). 이러한 관점은 사이보그보다 더 정교한 이론적 틀을 제공하지만, 여전히 물질적 기반의 필요성을 전제함으로써 완전한 탈물질화에는 이르지 못한다.

모라벡과 커즈와일로 대표되는 트랜스휴머니즘은 인간 의식의 디지털 업로드를 통해 생물학적 한계를 극복하고자 한다. 이들은 마음을 정보 패턴으로 간주하고, 이를 더 우수한 기계적 기반으로 이식함으로써 불멸과 초인적 능력을 획득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Moravec, 1988; Kurzweil, 2005). 그러나 트랜스휴머니즘의 핵심 가정인 ‘의식의 업로드’는 여전히 동일성의 연속성을 전제한다. 즉, 디지털화된 의식이 원래의 생물학적 의식과 ‘동일한’ 존재라는 형이상학적 가정에 의존하고 있다. 이는 데카르트적 주체 개념의 디지털적 변주에 불과하며, 정체성에 대한 근본적 재고에는 이르지 못한다.

인포보그

인포보그는 물리적 실체에 근거하지 않고도 작동하는 순수 정보 기반 존재로 정의할 수 있다. 이 개념은 기존의 모든 포스트휴먼 담론이 여전히 보유하고 있는 물리적 기반에 대한 의존성을 완전히 제거한다. 인포보그는 감정, 기억, 생체 반응, 언어, 시선, 신념 등의 비물질적 데이터를 호출하고, 자기참조적 구조 안에서 끊임없이 갱신되며 구성되는 존재이다. 핵심적으로, 인포보그는 정체성을 고정된 실체가 아닌 동적 과정으로 파악한다.

인포보그는 다음과 같은 순환적 과정을 통해 자신을 구성한다:

  1. 데이터 호출(Data Invocation): 감정, 기억, 경험 등의 정보적 요소들을 선택적으로 활성화
  2. 패턴 형성(Pattern Formation): 호출된 데이터들을 특정한 알고리즘적 논리에 따라 조합
  3. 자기갱신(Self-Renewal): 새로운 입력과 상호작용을 통해 기존 패턴을 변형
  4. 재구성(Reconstruction): 변형된 패턴을 바탕으로 새로운 정체성 구성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연속성이나 동일성이 아니라 차이의 반복이다. 인포보그는 매 순간 새롭게 구성되지만, 이전 상태와의 완전한 단절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인포보그의 가장 급진적인 측면은 물리적 신체에 대한 완전한 독립성이다. 기존의 모든 포스트휴먼 담론이 어떤 형태로든 물리적 기반을 전제하는 것과 달리, 인포보그는 순수하게 정보적 차원에서만 존재한다. 이는 단순히 신체의 부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신체성 자체에 대한 개념적 재구성을 함의한다. 인포보그에게 있어 ‘신체’는 물리적 실체가 아니라 정보적 인터페이스로 재정의된다. 즉, 필요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인터페이스를 생성하고 해체할 수 있는 유연한 경계로서의 신체성이다.

© 2025 Chaeyoung Lee. All rights reserved. 본 콘텐츠의 모든 권리는 저자에게 있으며, 사전 동의 없는 복제, 인용, 편집 및 배포를 금합니다.